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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이슈 - 배현진과 조순
    이슈/잡썰 2022. 6. 23.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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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이슈는 배현진과 조순이다.

     

     

     

     

    첫번째 이슈는 배현진 최고의원에 관한 이슈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23일에도 배현진 최고위원과의 악수를 거부하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지난 20일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의 공개 설전과 같은 극대화된 갈등의 모습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대표는 이날 오전 9시께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먼저 회의 자리에 도착해있던 배 최고위원은 이 대표가 입장하는 것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나 이 대표에게 다가가며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배 최고위원이 내민 오른손을 거부한 채로 자리에 착석했다.

     

    멋쩍어진 배 최고위원은 이 대표를 지나쳐 정미경 최고위원에게 다가가 악수를 했다. 배 최고위원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며 이 대표의 왼쪽 어깨와 등 부분을 손바닥으로 치며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이 대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 대표가 배 최고위원의 악수를 거부한 것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리로 들어오며 윤영석 최고위원과 이미 악수를 나눴지만 배 최고위원과만 악수를 나누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개 회의상에선 이 대표와 배 최고위원은 서로를 겨냥한 발언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이 대표는 통상적으로 최고위원회의 이후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진행했지만 이날은 모든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한 채 당 대표실로 향했다.

    앞서 이 대표와 배 최고위원은 지난 2주간 최고위원회의가 개최되는 월요일과 목요일 마다 부딪히는 모습을 나타냈다. 먼저 지난 13일 비공개 최고위에서 배 최고위원이 이 대표가 띄우고 있는 당 혁신위에 대해 "자잘한 사조직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고 비판한 사실이 보도됐다.

     

    또 16일 비공개 최고위에선 이 대표가 안철수 의원이 추천한 최고위원 인선안을 놓고 비판하자 배 최고위원이 "졸렬해 보인다"고 말한 것이 알려졌다. 이에 이 대표는 "지도부 구성을 바꾸는 중요한 문제"라며 맞받아쳐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갈등의 최정점은 지난 20일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였다. 비공개 회의에서 현안 논의 여부를 둘러싸고 양측이 공개적으로 설전을 벌이며 목소리를 높여 권성동 원내대표가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두번째 이슈는 조순 전 부총리의 별세 소식이다.

     

     

     

     

     

    한국 경제학계의 대부이자 관료, 정치인으로 이름을 떨쳤던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오전 94세로 별세했다. 조 전 부총리는 서울아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다.

     

    1928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난 고인은 경기고와 서울대 상과대 전문부를 졸업했다. 6·25 당시 육군 통역 장교와 육군사관학교 교관 등으로 군에 복무했다. 종전 후엔 미국으로 유학해 UC버클리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8년 귀국해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68년부터 20년 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순 학파’로 불릴 만큼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1974년 케인즈 경제학을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교과서인 ‘경제학원론’을 펴냈다. 이 책은 정운찬 전 국무총리, 전성인 홍익대 교수, 김영식 서울대 교수 등이 차례로 개정판에 공동저자로 참여하면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제학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읽힌다.

    고인은 육사 교관으로 있을 당시 제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권유로 1988년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며 경제 관료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1992년부터는 한국은행 총재를 역임했는데,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를 두고 정부와 갈등을 빚다가 1년만에 사표를 냈다.

     

    고인은 아태평화재단 자문 위원을 맡을 당시 인연을 맺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계에 진출했다. 1995년 민주당에 입당해 제 1회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길고 흰 눈썹과 그 동안의 대쪽 행보가 강조되면서 ‘서울 포청천’ 별명을 얻었다. 취임 직전 벌어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현장에서 시장 취임식을 열어 화제가 됐다. 당시 아스팔트로 덮여있던 여의도 광장을 여의도공원으로 조성한 것도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시장 임기를 10개월여 남겨두고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로 영입돼 대권에 도전했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와 전격 단일화하면서 대선은 완주하지 못했지만, 대신 초대 한나라당 총재를 맡았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은 고인이 직접 지은 것이다. 1998년 강원 강릉 재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돼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대표로 총선을 지휘했지만 선거 참패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엔 서울대·명지대 명예교수와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을 맡아 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92)씨와 장남 기송, 준, 건, 승주 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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